세뇌의 심리학을 읽다가 육아와 양육에 관한 내용이 나와 발췌 후 나름 내 생각을 정리 해보았다.
성인이 되었을때 생각과 행동은 아이(유년기)일때에서 비롯된다.
부모가 아이를 교육하고 양육하는 방식은 장차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었을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외부로부터 오는 자극 100%가 부모의 말과 행동에서 보고 느낀다. 부모로부터 오는 안정감과 행복함 이면에는 본능적인 행동을 가로막는 내면의 충동억제, 적개심과 불안감, 좌절이 자리잡는다고 한다.
아이에게 너무 억압된 통제는 삐뚤어진 복종과 순응을 야기하며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없다.
아이를 너무 심하게 통제할 경우에 자기자신이 무슨생각을 하는지 조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외부환경요인에 좌지우지 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사회에 순응하거나 또는 사회 구성원으로 일할 때 주체적인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없어 나중에 자기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삶을 사는데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좋아하는 것을 모르기에 누구나 쉽게 빠져 들 수 있는 도박이나 자극적인 사회이념등에 빠지기 쉬우며, 내면에는 주체할수 없는 분노가 서려있어 어느순간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다.
아이는 부모에게 사랑받음과 동시에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
"분리불안장애' 라고 간단히 설명이 될 수 있다. 애착형성이 필요한 시기에 부모와 분리될때에 불안함을 느끼는 아이를 말하는데, 이는 아래에 설명과 같이 부모가 아이에게 사랑과 다 너를 위해 하는거야 라는 부모의 개인욕구(아이욕구 아님)로 인해 그게 진정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닌 사회적 시선과 평판 또는 부모의 개인 욕심 등 삐뚤어진 사랑으로 아이는 아이일때 아이다움(미숙함, 습관화되지 않음)이 어느정도 인정되어야 하는데 부모는 그것을 못참고, 사회에서 평가하는 시선에 따라 과도한 지적, 무리한 교육, 과도한 행동제한 및 명령, 강제 음식 먹이기 등 아이가 아이다울때 심한 꾸짖음과 훈육을 하고, 아이욕구(부모의 아가페 사랑, 관심과 애정)를 무시한채 부모가 칭찬할만한 행동을 했을때 사랑의 보상이라는 미명아래 칭찬과 예쁨을 받을 때, 아이가 자기자신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이 되지 않은채 자기 욕구보다는 부모의 욕구가 우선시 될때 분리불안을 느낄 수 있다.
육아 및 양육은 알맞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인가?
아래에 글을 잘 살펴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생각하고 길들여져서 모나지 않은 1명의 구성원으로 잘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에게 강요하고, 배우라고 하고, 잘못되었다 지적하고, 잘했으면 칭찬해서 더욱 그렇게 하도록 또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이건 뭐든간에 강요이며, 이건 습관화 하여 보다 더 나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잘 살아가라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교육이라는 단어 아래에 아이에게 절제하고 통제하는 것을 가르키고 있다.
무엇이 올바른것인가? 진정으로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은건 그것보다 더 큰 그림일건데 정확히 말료 표현할 수 없다. 매체나 TV에서 물건과 재화를 팔아먹으려고 지속적으로 주입하는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나는 방법, 사회가 계속해서 주입하는 인위적인 세뇌에서 벗어나는 방법,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순 없지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넓은 시야,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이런 근원적인 답은 나도 잘 모른다. 근데 이런 물음을 던질수 있고 객관적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는 아이로 커가면 좋을 것 같다.
다음 포스팅에서 할건데, 안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사회로의 나아가는 모든 사회관계는 아버지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행실을 잘해야겠다. 아래는 이러한 생각들을 하게 해준 세뇌의 심리학에서 발췌한 "틀을 형성하는 양육"의 일부 글이다.
틀을 형성하는 양육
현대 심리학에서 우리가 배운 중요한 사실 하나는 성인의 태도와 문제의 뿌리 상당 부분은 보살핌을 받던 유년기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아이는 어렸을때 바쁘다.
영아의 삶은 평온하고 아무 사건도 일어나는 것 같지 않지만, 사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기 안의 마음과 바깥 세계에서 수많은 웅성거림 을 듣는다.
부모의 사랑은 옳은 행동을 했을 때만 주어지며, 이 옳은 행동은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것이 아닌 학습하고 사회화된 것이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는 따뜻함과 차가움을 몰랐지만, 이제 아기의 피부는 이러한 자극을 전달한다.
엄마의 몸속에 누워 보호받고 을 때는 숨쉬고 먹고 배변할 필요가 없었지만, 이제 이러한 일을 스스로 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도움과 보호가 필요하므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만 의지해야 한다. 아기는 완전히 의존적이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단지 사회에 적응해야할 습관을 길러야할 때이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온기·영양·사랑은 '옳은 행동을 했을 때만 주어지며, 이 옳은 행동은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것이 아닌 학습하고 사회화된 것이다.' 부모는 아기에게 이를 요구한다. 부모는 아기를 자신들의 습관에 맞추려 하고, 아기는 자신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얻으려면 이러한 외부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 전적으로 의존적인 아기가 애정과 보호를 받으려면 미묘하고 이해하기 힘든 수백 가지 규칙을 따라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아기를 많든 적든 순응하는 존재로 만든다. 아기가 흡수하는 부모의 도덕관은 아기 안에서 언제나 살아 있는 힘이 된다. 아기는 부모와 사회가 바 람직하다고 생각하는 형태의 습관을 형성하도록 조건화된다. 성인이 되 어서의 행동은 부모가 취한 행동의 그림자 아래 있다. 인내심 있는 어머 니는 자녀에게도 인내심을 남긴다. 불안하고 충동적인 어머니는 자녀에게 긴장감을 남긴다.
부모가 아이의 욕구를 제한하고, 통제하는건 공동체 생활을 위한 것이다.
사랑으로 가득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사랑과 애정에 대한 내면의 상 을 발달시킬 것이고, 부모가 자유를 제한하고 규칙을 정하는 것을 더 잘 받아들일 것이다. 시간표, 배변 훈련, 부모가 겪는 혼란도 받아들일 것이 다. 아이의 욕구가 그런 사회적 요구와 반대되더라도 지나친 내적 저항은 없을 것이다. 아이는 시간표에 따르면 배고프지 않아야 할 시간에 먹고 싶어 할 수 있다. 그리고 부모가 깨어 있었으면 하는 시간에 아이는 자고 싶을 수 있다. 사회는 아이가 자신의 만족을 지연시키는 방법을 배우기를 요구하는데, 여기에 아이는 부모의 애정에 대해 느끼는 안정감에 비례해 반응할 것이다. 음식을 먹으려면 기다려야 하고, 더 이상 젖을 빨도록 허락되지 않고, 변을 보고 싶은 욕구를 통제해야 하는 것 모두가 아동에게는 새롭고 어려운 적응이다. 욕구를 즉시, 조건 없이 만족시키고자 하는 충동을 더 복잡한 것, 즉 학습된 반응의 연속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인생 초기의 문화적 의무를 아동이 해내는 다양한 방식을 설명하는 것 은 우리에게 중요치 않다. 하지만 비사회적이고 원초적인 아동을 성인의 틀에 맞추기 위해 유아원에서 자연스러운 반응을 변화시키고 재조건화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아마 아동은 이 과정에서 싹튼 좌절을 안고 아동기를 마칠 것이다. 개인의 문제는 자신이 양육된 방식에서 비롯된다. 이 방식은 어느 정도 문화 전통과 아동이 태어난 공동체 관습의 산물이다.
아이에게 과도한 좌절과 규칙제한은 성인이 되었을때 잘못된 행동과 문제를 일으킨다.
우리 사회는 아동이 생물학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준비되 지 않았을 때 좌절과 제한을 가르치며, 우리 문화는 그런 식으로 성인의 행동 문제, 복종이나 공격성의 신경증적 태도로 이어지는 길을 닦는다. 이 러한 태도는 전체주의 집단에 대한 충성과 지지로 표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동에게 비굴하고 복종적인 태도가 조건화되는 것은 부모가 영아에게 사회의 규범과 규칙을 자동적으로 적용할 때부터 시작될 수 있다. 부모는 아이를 시간이나 청소에 집착하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또는 아이에게 너무 빨리 말을 하라고 강요하거나, 목을 가다듬을 때 조용히 하라고 하거나, 몸에 기운이 넘칠 때 자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부모는 자녀에게 계속해서 죄책감을 심어준다. 부모의 요구에 복종하지 못할 때 마다 불편하고 불행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부모가 마뜩 잖더라도 부모를 사랑하라고 자녀에게 강요한다. 부모는 자녀가 보기에 완벽하게 허용 가능한 행동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한다. 자녀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잘못된 죄가 아닌 죄를 자백하라고 요구한다.
아이에게 과도한 관심과 애착은 삐뚤어진 안정감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며 성인이 되어서는 극단적인 복종과 순종 행동을 보일 수 있다.
세뇌의 기술 중 일부는 요람(어린 아이를 태워 흔들어 놀게 하거나 잠재우기 위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부모는 자녀를 번갈아 심문하고, 앞치마끈으로 묶고, 계속해서 감시할 수 있다. 부모는 자녀에게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며 스스로 안전하다는 느낌을 즐기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런 환경 에서 무력한 아이는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진다. 아이는 안정감을 얻기 위해 더 순응하고 복종한다. 이러한 행동이 내면의 큰 저항심과 적대감을 가린다.
자녀가 본능적 욕구를 개방적이고 직접적으로 표현하도록 부모가 허락 하지 않으면, 아이로 하여금 욕구를 표현할 다른 방식을 찾도록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약 태어나서부터 시작되는 초기 훈련에서 영아의 욕구를 직접 표현하는 것을 끊임없이 제한한다면 아기는 긴장, 안절부절못함, 울음과 같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이를 소통하려고 할 것이다. 아이는 본능적 충동을 자연스럽게 배출하는 대신 충동을 억누르고 통제하도록 조건화된 다. 부모를 기쁘게 하려고 충동을 통제하기 위해 애를 쓰면서, 아이의 자연스러운 표현 수단은 거꾸로 된다. 표현하는 대신 억압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극단적인 복종·순종의 욕구와 같은 성인기 행동의 뿌리이다.
아이의 과도한 통제는 체념하게 하고,불안하게 하며 자기 자신에게 조차 스스로의 존재를 감춘다.
이렇게 피학적 체념의 행동 패턴은 영아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복종과 자백은 아이가 세상이 너무 강압적이라고 느낄 때만 가능한 전략이다. 내면의 저항. 적대감 증오는 역설적인 방식으로만 표현된다. 아이의 완고 한 침묵은 아이가 울고 소리치고 싶어 한다는 증거이다. 아이는 마법을 부리는 듯한 동작, 우스꽝스러운 행동, 심지어 간질 발작을 통해 잔인한 세계를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공격한다. 본능적 욕구와 만족을 얻을 수 있 는 수단을 억누르도록 강요당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스스로의 존재를 감추게 된다. 표면적인 순응이 그의 유일한 소통 수단이 되고, 이렇 게 되면 말과 동작은 은폐의 기능을 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절대 진심을 말하지 않고, 차츰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조차 모르게 된다. 이러한 양육이 성인기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명확하다. 순응하도록 훈련받은 아이는 전체주의 지도자의 권위주의적 요구가 주는 안도감을 반기는 어른으로 자라난다. 이는 새롭게 정서적 에너지를 투자하지 않고도 따를 수 있는 오랜 습관의 반복이다. 그는 자신의 공격성을 희생양에게 돌리도록 미리 훈련받았기 때문에, 이제 부모의 규칙과 통제에 대한 숨겨진 분노를 전체 사회로 돌린다. 또는 폭력적인 군중이나 히틀러의 나치 돌격대(Sturmtruppen)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분노를 거칠게 폭발시 킬 수도 있다.
다른 양육 형태도 아동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만약 나중에 자연스럽게 발달할 습관을 미리 훈련시키면, 자연스러운 행동에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너무 이른 배변 훈련의 영향은 자주 나타나는데, 부모의 다른 명령도 같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아동의 옷 입는 방식이 어때야 한다는, 또는 언제나 조용히 해야 하고 잠들어야 하고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는 부모의 끊임없는 요구도 마찬가지로 적절한 예이다. 아동이 충분히 자라지 않았을 때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는 명령은 모두 좌절을 불러올 수 있다. 외부의 권력이 아동에게 강요하는 바는 내적이고 자동적인 규칙, 즉 강박 이 된다. 배변 훈련은 전체 훈련의 한 부분일 뿐이지만, 잠시 그 예로 다 시 돌아가보자. 너무 어린 나이에 배변욕구를 통제하도록 훈련받은 아 이는 깨끗해야 하고 언제든지 배변을 참아야 한다고 배운다. 아이의 몸은 자동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이렇게 하도록 강요하는 사람들에게 증오를 느낀다. 아이는 늘 적대적인 어른으로 성장하고, 적대적인 이념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통제가 심하지 않은 경우에는 외부의 통제와 내부의 긴장을 풀고 싶은 욕구 사이의 갈등이 내면에서 계속 불안감을 만들어내게 된다.
아니면 끊임없이 분노를 표출할 수도 있는데, 이는 독재자가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특성이다. 우리가 강조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부모와 자녀 사이 소통의 망은 심리학에서 언어 이전의 무의식 수준이라고 하는 곳에서 가장 먼저 생겨난다.
말이 필요 없는 접촉이 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자신의 기분 을 전달하게 된다. 아이는 엄마의 감정을 느끼고 포착한다. 아이 또한 자 기 기분을 엄마에게 옮긴다. 엄마는 아이의 고통과 기쁨을 바로 느낀다. 아이는 이러한 민감성으로 인해 크게 반응하게 된다. 아이는 부모의 감정을 본능적으로 안다. 불안, 불안정함, 유아적임, 부조화, 신경증적 사랑, 가난, 실존을 위한 투쟁, 강박적 독재와 같은 부정적 부모 요인은 아동에 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얼마 전 나는 어머니의 손길이나 수유를 거부 하는 영아를 치료한 적이 있었다. 아이는 안먹는 자신에게 엄마가 마음 속 깊은 곳에 자신에 대한 원망과 증오, 적대감을 숨기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엄마의 혐오와 거부를 느꼈다. 하지만 아기는 그런 엄마를 벗어나 다른 사람이 주는 음식은 받아 먹었다.
부모의 일관되지 않은 육아는 아이에게 혼돈을 불러일으키며, 아버지와 있어도 불안하고, 어머니와 있어도 불안하다. 부부관계가 좋지 않으면 아이는 사회에 나가서 관계 맺기를 어려워 한다.
아마 왜곡된 성장의 가장 명확한 예시는 내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치료한 환자일 것이다. 그때 나는 나치 부역 혐의자들에 대한 심리 연구를 요청 받았다. 내가 처음 보았을 때 그 환자는 영국에 있었는데, 나치가 네덜 란드를 점령했을 때 독일 점령군과 더 이상 뜻을 같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네덜란드를 떠났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에 도착해 조심스러운 계획에 따라 첩보 혐의로 조사받는 사람들을 위한 시설로 옮겨졌다. 그러나 곧 이상한 행동으로 인해 정신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정신병 증상을 보 이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내가 면담하러 갔을 때, 그는 완전히 혼란에 빠진 것이 확실해 보였다. 웅얼 거림이 너무 심해서 그의 말을 이해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나는 그에게 어린 시절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결국 자신의 성장 배경에 대해 조금 말해주었다. 그는 외아들이었다. 과학 연구를 활발하게 하던 그의 어머니가 가족 중에서 지배적이고 결정권을 가진 어머니 였다. 그의 아버지는 약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는데, 집에 있을 때가 거의 없었다. 큰 회사의 관리자로 일하면서 출장을 다닐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환자는 드물게 아버지가 집에 있을 때면 부모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고, 종종 아버지가 어머니의 끊임없는 지시에 속수무책이었고, 그냥 저항할 뿐이었다.
소년은 어떨때는 어머니 편에 서서 아버지의 무관심과 의욕없음을 비판 했고, 어떨 때는 아버지에게 가서 어머니의 숨 막히는 행동에 대한 도움과 사랑을 받고자 했다. 하지만 소년은 대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집에 혼자 남겨졌다. 십대 후반에 소년은 동성애에 대한 애착을 느꼈는데, 이 관계에서 그는 수동적이고 복종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가 살아 있다고 느낀 것은 친구 중 한 명으로 인해 파시즘에 동참할 때였다. 소년은 힘과 공격성의 과시에 크게 흥분했고 심지어 성적 자극을 느꼈다. 그는 부모의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파시스트 집단에 가입했지만, 정당의 일을 적극적으로 한 적은 없었다. 당은 그가 갈망하던 지도와 사랑을 주 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치의 침공과 점령 이후 당은 그에게 독일에 더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 을 요구했다. 이제 양심의 가책이 그를 괴롭혔고 몸이 아팠으며 온갖 위장병에 시달렸다. 정신과 의사가 보기엔 분명 정서적인 데에서 기인한 증상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당에 완전히 등을 돌릴 정도로 강하지 못했다. 그는 두 가지 상반된 위험, 즉 당과 반역 사이에 갇혔다고 느꼈다. 아동기의 갈등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아버지와 있어도 어머니와 있어도 안전 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느낌을 따라 모국에서 도망치기로 했다.
영국 정신병원에서 그는 완전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심각한 혐의로 기소되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세계 동향과 그의 정치 활동 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했지만, 그는 침묵에 빠졌다. 그는 자신이 했던 정치적 행동을 자세히 기억하지 못했다. 마치 네덜란드에서 도망친 순간부 터 꿈속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적이 그를 도구로 이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했지만, 동시에 그는 정신병자에 가까우며 두려움에 지배당하는 젊은이 이기도 했다. 그는 전쟁 기간 내내 병원에 남아 있었다.
(병리학적 현상의 복잡성을 떠나 생각할 때) 이 사례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청년이 끊임없이 남성의 권위를 찾아 헤맸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적 버팀목을 찾는 일은 전체주의에 애착을 갖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일반적이다.